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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는 뱀파이어 영화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상현이 자기 자신에게는 물론 신자들에게 가르치며 암송하는 이 기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임하고자 하는, 모든 개인적 욕망을 버리고자 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영화 는 바로 이 기도문에서 출발한다.
상현은 정말 뱀파이어이긴 한걸까? 상현은 자신이 뱀파이어라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박쥐”는 뱀파이어 영화의 장르적 규칙을 하나하나 모두 성실히 따르진 않는다. 관객은 상현의 입에서 돌출된 뾰족한 송곳니를 볼 수 없다. 상현은 십자가가 난무하는 성당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그러나, 상현은 뱀파이어와 마찬가지로 피에 무척 끌린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피의 섭취를 게을리하면 어김없이 그의 몸은 흉측한 수포로 뒤덮히고, 피를 먹는 순간 수포는 씻은 듯이 사라진다. 우리는 아직까지 이러한 뱀파이어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새로운 모습의 뱀파이어의 탄생일까? 어찌보면, 상현은 뱀파이어가 아니라 (비록, 자신은 자신이 뱀파이어라 확신하지만), ‘이브’라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정상적이 아닌 특수한 신체적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부작용으로 인해 몸이 수포로 뒤덮히는 현상을 겪고 있으며, 혈액만이(혹은 혈액 속에 있는 어떠한 성분) 이 부작용을 치료해주는 특수한 병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질문을 하자. 상현은 뱀파이어인가? 뱀파이어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상현이 뱀파이어가 아닐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더라도 여전히 영화 “박쥐”는 뱀파이어 영화라고 답할 수 있다. 이건 또 무슨 얘기? 뱀파이어 영화는 에로티시즘과 욕망에 관한 영화이다. 아름답고 순결한 여성, 그녀의 하얗고 가녀린 목, 남성의 신체에 위치한 뾰족히 튀어나온 날카로운 송곳니, 그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그리고 원색의 빨간 피. 이러한 뱀파이어 영화의 요소는 영화 속에서 에로티시즘을 현상화하고, 남성의 욕망을 구체화한다.
영화의 초반부는 상현의 갈등을 농밀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상현의 갈등은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어 피를 마셔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갈등, 즉 뱀파이어로서의 갈등이 아니다. 그의 갈등은 오히려 그동안 성직자로서 억제하고 감추어왔던 인간으로서의 육체적 욕망에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갈등이다. 병상에 누워있는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람의 피를 빼내어 마실 때 상현은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못한다. 상현은 오히려 그도 이해하고 좋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욕망은 태주를 만나며 폭발한다. 태주의 땀에 젖은 끈적한 목덜미를 보며 그동안 성직자로서 억제해 왔던 성적 욕구가 브레이크 없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 경계에서 갈등을 하던 상현은 결국 성직자에서 (뱀파이어가 아니라) 욕망에 가득 찬 남자의 모습으로 넘어와 친구의 아내인 태주와 몸을 섞고, 그녀와 함께 친구를 살해하며 원하는 여자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영화는 그 이후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오히려 더 불행해지는 상현을 혼돈 속에서 보여준다.
“박쥐”는 온갖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상현의 피를 마심으로써 감각을 회복하여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육체적 쾌락을 맛보고자 하는 노신부의 욕망. 상현을 구원이라 믿고 그를 통해 병을 치유하고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신자들의 욕망. 태주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그녀와의 하룻밤을 상상하는 남자들의 욕망. 자신의 아들을 죽인 상현과 태주를 죽이고자 하는 엄마의 욕망. 한복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태주의 욕망. 태주를 갖고자 하는 상현의 욕망. 이 모든 욕망이 살을 섞으며 창조하는 세상이 영화 “박쥐”이다. 상현의 욕망에 대한 내적 사투가 농밀히 그려지는 초반을 지나 태주 역시 상현에 의해 뱀파이어가 된다. 태주는 상현과 달리 자신의 욕구를 거침없고 죄의식 없이 충족시켜 나간다. 상현과 태주. 혹은 갈등 속의 나약한 인간과 욕망의 뱀파이어. 태주를 보며 상현은 그제서야 자신이 더이상 가지 말아야 할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듯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그들 모두의 욕망은 중지되고 억압되어야 하는 것일까? 노신부는 상현의 손에 죽고, 남자들은 상현과 태주에 의해 죽는다. 그리고, 상현과 태주는 아침 해 속에서 목숨을 버린다. 그들은 죽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일까? 죽음이 구원이라면 그럴 수 있겠으나, 죽음은 구원이 아니라 고통의 연장일 뿐이다. 상현은 마지막 순간 태주에게 말한다. “태주씨를 사랑했지만, 지옥에서 다시 만나요.” 그들은 죽음을 통해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혹은 태주의 말처럼 구원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서 ‘끝’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냥 거기에서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 채 끝날 뿐이다. 신자들은 어떠한가. 상현은 마지막 순간 그들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은 그들이 믿는 구세주가 될 수 없음을 강변하여 그들을 구하고자 한다. 과연 그 후로 신자들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깨달았을까? “박쥐”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 온전히 구원받는 것이 확실한 사람은 바로 엄마이다. 아들을 죽인 상현과 태주가 자신의 눈 앞에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며 엄마는 바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구원받는다.
욕망의 지옥도. “박쥐”는 그렇게 뱀파이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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